익명의 숲, 몽환의 숲

고충환·미술비평

성곡미술관이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내일의 작가’ 수상전 형식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김건주는 숲을 주제로 한다. 작가의 근작들을 일별하면 주로 환경/생태/자연에 맞춰져 있으며, 이번 전시 역시 이런 주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

김건주는 자기가 만난 숲을 익명의 숲이나 몽환의 숲으로 명명하고 있는데, 이는 숲으로 대변되는 환경/생태/자연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즉 작가는 숲을 익명의 것으로, 그리고 몽환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왜 익명의 숲인가. 그것은 보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만 듣지 못하고, 만지지만 느끼지 못하는 인간과 타자로서의 자연이 갖는 요원한 관계 또는 소외를 은유한 것이다. 혹은 사물을 명명하는 것이 인간의 일임을 생각하면, 숲이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맞잡을 수 없는 숲의 자족적인 삶을 의미한다. 이렇듯 작가는 은유로써 숲을 인간의 의식이 포섭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설정한다. 이런 미지의 영역으로서의 숲을 또 다른 은유로 덧씌운 것이 몽환의 숲이다. 몽환의 숲에서 인간의 의식은 길을 잃는다. 몽환의 숲은 숲이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는 무의식의 공간이기 때문이며,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비현실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무가 말을 걸어오는 꿈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익명의 숲에서 숲의 자족적인 삶을 보았다면, 몽환의 숲에서는 숲의 생명/욕망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백색 덩어리로 추상화한 나무의 형상이 마치 숲의 형해(形骸)를 보는 듯하다. 인간을 정화하는 숲의 치유력 대신, 인간의 논리로서 숲의 생명력을 정제해낸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인상은, 부분적으로 유기체적인 요소가 도입되고는 있지만, 대략적인 추상적 형태와 무엇보다도 흰색이 대상(자연)으로부터 순수한 결정체(자연의 본질)를 추출해내려는 논리의 기획과, 뼈(자연의 본질)를 발라내기 위해 살(자연)을 버리는 표백의 기획을 상기시키는 탓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삼각뿔의 중첩과 변주, 그리고 원으로 형상화한 자연에서는 자연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하고자 한 세잔의 기획을 상기시킨다. 세잔이 변화하는(동적인) 자연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정적인) 자연을 발견한 것에 비해, 작가는 속도/빠름/질주/달아남의 어휘로써 인간의 의식에 포섭되지 않을 만큼 소원해진 자연을 붙잡으려 한다. 키네틱 아트의 요소를 도입한 자연을 축약한 미니어처에서는 시지각의 중심에 이르지 못한 채 잔상으로만 남은 자연이 자연에 대한 동시대인의 소외를 떠올리게 한다. 김건주는 이렇듯 인간의 논리가 표백시킨 자연, 그리고 인간의 질주가 소외시킨 자연을 치유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생명줄을 끌어온다. 전시장 바닥을 가득 메운 마치 혈관의 망을 보는 듯한 형상이 그것이다. 자연으로 화한 공간 속에서 관객은 마치 자연의 몸 속으로 들어 온 듯한, 자기의 몸과 자연의 몸이 동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한가운데에 자연을 기리는 제단이 놓여져 있다. 이로써 작가는 자연과 인간과의 일체화로써 자연과 인간과의 소원해진 관계를 복원시키는가 하면, 제단으로써 자연의 주술적인 능력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익명적인, 몽환적인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An anonymous forest, a dreamy forest.

Kho Chunghwan,  art critic

In the exhibition, which was held by Sunggok Museum of Art in the form of an award-winning exhibition for “Tomorrow’s Artist” to support the artist, Kim kun-ju will be the theme of the forest. A glimpse of the artist’s recent works is mainly focused on the environment, ecology, and nature, and this exhibition is also an extension of this theme consciousness.

Kim kun-ju names the forest he met as an anonymous forest or a dreamy forest, which is a clue to understanding the writer’s position on the environment, ecology, and nature represented by the forest. That is, the author understands the forest as anonymous and dreamy. Why an anonymous forest? It is a metaphor for the distant relationship or alienation of nature as a batter with humans who see but cannot see, hear, and touch. Or considering that naming things is a human job, the lack of a forest means a self-sufficient life in a forest where human consciousness cannot hold together. As a metaphor, the artist sets the forest as an unknown area where human consciousness cannot capture. Another metaphor for overlaying the forest as an unknown area is the dreamy forest. Human consciousness is lost in the dreamy forest. Dreamy forests are unconscious spaces where forests reveal their desires, and unrealistic spaces where all boundaries are broken down. It is also because it is a dream space where trees talk to each other. If the author sees the self-sufficient life of the forest in an anonymous forest, the dreamy forest meets the forest’s life/desire. The shape of the tree, abstracted into a huge white mass, looks like a forest formation. Instead of the healing power of the forest that purifies humans, it gives the impression that it has refined the vitality of the forest with human logic. This impression is partly due to the introduction of organic elements, but the approximate abstract form and above all, the planning of logic to extract pure crystals (the nature) from the object (the nature) and the planning of bleaching flesh (the nature) The overlapping, variations, and circle-shaped nature remind us of Cezanne’s plan to return nature to its geometric form. Compared to Cezanne’s discovery of unchanging (static) nature in changing (dynamic) nature, the author tries to capture nature that has become so estranged that it is not captured by human consciousness as the vocabulary of speed/fastness/ gallop/moon man. In the miniature, which abbreviates nature that introduced the elements of kinetic art, nature, which has not reached the center of vision and remains only an afterimage, reminds us of contemporary alienation of nature.

Kim kun-ju draws a lifeline from nature to heal the nature bleached by human logic and the nature alienated by human gallop. It is a figure that looks as if it is looking at a network of blood vessels that fills the floor of the exhibition hall. In a naturalized space, the audience experiences the assimilation of their bodies and nature’s bodies as if they had entered the body of nature. In the middle of it lies an altar honoring nature. As a result, the author restored the estranged relationship between nature and man through the integration of nature and man, and revived nature’s magical abilities as an altar. And above all, it brings nature back to its anonymous, dreamy original pl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