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모스의 조각학
홍지석( 미술비평)
김건주의 조각은 양방향의 욕망을 내포한다. 하나는 “형(form)의 구축”을 향한 욕망이다. 그의 조각은 먼저 혼돈(chaos)을 질서(cosmos)로 이끄는 방향을 취한다. 즉 비가시적인 것, 규정하기 어려운 애매한 것들에 가시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러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닫힌 형태(closed form)를 취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작가는 그 닫힌 형태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해버리는” 우격다짐의 폭력이 될 것을 근심한다. 따라서 그는 그 닫힌 형태를 열린 형태(open form)로 풀어헤칠 가능성을 살핀다. 이렇게 열린 형태를 갖게 됨으로써 조각은 가능성들로 충만한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 여기에는 “형의 해체”에 대한 욕망이 자리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 작품은 다시 금 혼란의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작가가 염려하는 바다.
김건주의 조각을 추동하는 두 가지 욕망, 곧 ‘형의 구축’과 ‘형의 해체’, ‘질서(닫힌 형태)에의 열망’과 ‘혼돈(열린 형태)’에의 열망‘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배척한다. 닫힘과 열림, 양자가 공존하는 상태를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설령 공존한다고 해도 한쪽으로 힘이 쏠려 균형이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대부분 예술작품은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의 승리를 공표하는 입장을 취하기 마련이다. 가령 바타 유(Georges Bataille)가 에로티시즘을 설명하면서 내세운 “파괴하기 위해 구축한다”라는 식의 논리가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닫힘과 열림, 양자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존재 이유로 삼는 작업들이 존재한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카오스모스(Chaosmos)의 시학‘으로 지칭한 경향성을 갖는 작업들이다. 나는 김건주의 조각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온갖 관점들을 내 안에 끌어들여 조율하거나 균형을 잡는 일”이야말로 이 작가의 주된 관심사다. 이를테면 사물(+)/그림자(-)의 의미론적 위상을 형태론적 수준에서 역전시켜 그림자에 포지티브(+)의 형태를 사물에 네거티브(-)한 형태를 부여한 후 양자의 역학을 조율하는 식이다. 또는 비정형(inform)의 ‘구름’에 닫힌 형태를 부여하되 그것이 또한 구름의 유연성을 간직하도록 하는 도전적인 시도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런데 열림과 닫힘은 어떻게 조각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을까? 즉 형을 구축하면서 형을 풀어헤치는 일, 또는 형을 풀어헤치면서 동시에 형을 구축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작업을 최적화할 수 있는 재료를 탐색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작가의 요구일 것이다. 닫힌 형태를 지니지만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언제든 변형이 가능한 재료 말이다. 돌이나 철은 너무 단단하고 무거워서 이런 작업에 적합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깃털이나 물방울, 라텍스 같은 것들은 너무 가볍고 유연해서 닫힌 형태를 구현할 수가 없다. 이러한 자문자답 과정에서 이 작가가 주목한 재료가 바로 스펀지다. 스펀지는 닫힌 형태를 갖지만 언제든 절단하고 접고 끼우고 구기는 일이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얻은 잠정적인 형태를 핀으로 고정하는 일도 가능하다. 즉 유동적인 형태를 고정시킬 수 있다. 그렇게 얻은 형태를 이 작가는 “움직일 수 없는 유연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스펀지를 접고 구기는 과정에서 얻은 형상은 또한 매우 선적(linear)이다.
과거에 고유섭이 주장한대로 운동태, 또는 경향태를 근본으로 하는 예술은 선(line)을 일획(一劃)하는데서 시작하지만, 완성태 내지 존재태 를 표현하는 예술은 대상을 ‘한 덩어리’로 보고 ‘한 덩어리’를 표현하려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덩어리를 표현하는 예술에서 우리는 “형성 중의 형”을 볼 수 없고 오로지 “형성이 완성된 형”을 볼 수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선은 면(面), 또는 덩어리(塊)와 달리 방향성을 갖기에 “형성을 표시하는 동시에 형성 중의 것을 표시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을 고유섭은 “선의 운동태”라고 불렀다. 다시 김건주에게로 돌아오면 그가 스펀지를 접고 끼우고 구기는 과정에서 ‘선의 운동태’에 주목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라 할만 하다. ‘선의 운동태’를 아우르는 조각을 상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사실 이 조각가가 선(線)의 방향성에 주목한 것은 스펀지를 발견 하기 훨씬 전의 일인데 이를테면 <익명의 숲>을 표제로 내세운 2001년 성곡미술관 전시에서 그는 숲에서의 이동경로와 산 능선의 궤적을 ‘선적으로’ 재구성한 설치작업-<멈춤-재현·실재>을 선보인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스펀지를 자기 조각의 재료로 택한 것은 어쩌면 그것이 ‘선’의 특성, 또는 뉘앙스를 간직하고 있어서 일 수 있다.
김건주의 조각 작업에 개입된 ‘선’은 조각의 주된 요소로 적극적으로 용인됐다. 그것은 때때로 독자적인 ‘형태’로서의 의의를 갖는 것으로 부상하기도 했고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요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작가의 작업 노트에는 “연장선이 흐려지는 드로잉”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그의 조각 작업에서 선을 그리거나 긋는 일이 갖는 의미를 함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김건주의 조각이 운동태(경향태)로서 선의 열린 동세를 다시금 덩어리(mass)의 닫힌 형태로 되돌리는 방식이다. 가령 이 작가는 특정 틀에 스펀지를 끼워 넣거나 구겨 넣는 식으로 조각의 덩어리를 가시화한다. 이러한 양방향의 균형은 의미와 형식(또는 물성)의 관계에서도 관찰 가능하다. 즉 이름을 갖는 스펀지의 형상들(때때로 스펀지는 동물의 형상, 또는 문자(단어)들의 형태로 절단된다)은 하나의 틀 속에서 구겨지고 뭉쳐져서 그 이름이 가리키는 형태를 상실하고 덩어리를 이루는 요소들로 환원되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여전히 동물의 형상이나 단어들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건주의 조각은 아주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양방향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구축됨과 아울러 해체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나는 카오스모스의 시학을 말했는데 그의 작업이 철저하게 조각적으로 그 시학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카오스모스의 조각학”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Sculptural Studies of Chaosmos
By Hong Ji-suk (Art Critic)
Kim Kunju’s sculpture connotes two-way desire. One is a desire for the “construction of form.” His sculpture’s top priority is to lead chaos to order. That is, what counts is to lend visible form to the invisible and ambiguous. This desire makes him inevitably take closed form. However, he fears that this closed form might be an aggressive attempt to “define the indefinable.” Thus, he searches for how to turn closed form into open form. By doing this, his sculpture remains replete with possibilities. A desire for the “deconstruction of form” will be settled here. Of course, the artist is concerned about his work’s return to a chaotic state.
The two modes of desires motivating Kim’s sculpture, the “construction of form” and the “deconstruction of form” and the “desire for order” (closed form) and “desire for chaos” (open form) elementally exclude each other. It is not easy to consider any coexistence of these two elements of closing and opening. Even though they can exist, there is a strong possibility any balance between them may shatter. Therefore, most artworks tend to announce one side’s victory. This includes the logic, “construction for deconstruction” Georg-es Bataille presented to account for eroticism. All the same, there are works that employ strained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erparts of closing and opening. These are works referred to as “Poetics of Chaosmos” by Umberto Eco. I think Kim’s sculpture is included in this category. His primary concern is “to draw every perspective of the world into me and tune and balance them.” For example, his way is to tune up the “roles of a thing (+) and its shadow (-) by lending positive form to the shadow and negative form to the thing. He also makes a defiant attempt to lend closed form to a cloud but enable the cloud to retain flexibility. If so, how does closing and opening interact sculpturally? How is it possible that one constructs form while deconstructing form and vice versa? It is quite natural to explore materials to optimize this kind of work. Such materials should have a closed form but be open to variations at any time as they should be soft and tender. Materials such as stone and steel are too heavy and hard and are thus not appropriate for such work. Likewise, materials like feathers, water drops, and latex are so light and pliable that they are unable to have a closed form. He focused on sponges during this process. A sponge has a closed form but can be cut, folded, inserted into things, and crumpled. The temporary shape created through this process can be made permanent with pins. In other words, its fluid form can be fixed. Kim refers to such a form as “immovable flexibility.” The form obtained through a process of folding and crumpling sponge is also very linear.
As Goh You-seob previously asserted, art based on the form of movement or tendency starts from drawing lines while art representing the form of completion or existence begins from expressing a mass. He claimed that what we discover in art that expresses such mass is “form whose formation is completed,” not “form that is under formation.” Contrary to this, as a line has a direction unlike a plane or mass, he asserted that “a line can be a reference to something whose formation is completed and also to something which is under formation.” Goh referred to this as the “form of movement of a line.” Kim focuses on this “form of movement” in the process of folding, inserting, and crumpling sponge. This can be seen as a very meaningful event in his art. That’s because he becomes able to envisage sculpture that encompasses the form of movement of a line. In fact, Kim began taking notice of the directivity of lines long before he discovered sponge. He has exhibited Pause-Representation, Existence, an installation that “linearly” reconstructs a moving route in the woods and a mountain ridge at his 2001 solo show, Anonymous Forest at Sungkok Art Museum. In this sense, he has probably chosen sponge as his overarching medium since it retains the trait or nuance of lines.
Kim’s sculptural works actively involve the use of a line as its primary element. The line in his pieces works as an independent “form” and is used as an element that links this to that. The phrase “a drawing whose extending line is blurred” in his statement is perhaps in reference to rendering lines or the meaning of rendering lines in his sculptural work. It is interesting how he returns the open form of a line to the closed form of a mass in this work. For instance, Kim visualizes sculptural mass by inserting or crumpling a sponge into a specific frame. Such two-way balance can be observe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aning and form (or material property). The shapes of sponges with names (some sponges are cut into the shape of animals or letters) are crumpled and crushed, causing them to lose the forms their names refer to and be reduced to elements of mass. Upon closer examination, however, the original animal forms and letters can still be made out. In this sense, Kim’s sculptures can be described as being constructed and then deconstructed by thor-oughly respecting two-way aspects. I mentioned poetics of chaosmos above. Can we describe his works as being “sculptural studies of chaosmos” as his works completely embody such poetics sculpturally?